인쇄

< 노마딕 빌리지>는 일정 기간 동안 예술가들이 함께 생활하며 작업하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길 위에서 작업하다’라는 컨셉트로 유럽 일원을 이동하며 활동을 펼치는 언더로드프로덕션이 기획을 맡고 있다. 뉴미디어 분야를 폭넓게 지원하는 오스트리아의 슈미에드(Schemiede) 재단이 후원했다.

‘길 떠남’의 예술, 대지의 생명을  향하여

글|김주영·작가, 홍익대 부교수

디지털 노마드, e-mail 한 통에 길을 떠나다

길 을 떠난다. 왜 이리 설레는 것인가. 수 십 년을 정처 없이 떠돌아도 다녀보았건만 왜 길을 떠나는 것은 그 순간마다 이리도 가슴 벅찬 것인가. 옥죄인 현실의 밑바닥에서 헤어나는 후련함과, 긍정적이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연민의 회한 때문인가. 무엇보다 닥쳐올 길 위의 불확실한 에트랑제르의 고독과 우울증적 슬픔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길 떠남이어서 인가. 나는 아무래도 그 얽힌 감성의 디오니소스적 제전에 스스로 뛰어드는 제물인 것 같다. 신의 품에 안기는 제물의 환영에는 숭고한 영혼을 향한 환희가 있다. 그것은 희랍적 거대서사가 아니어도 좋다. 배고플 때 쌀 한 줌의 신성, 그것은 생명의 힘이다. 생명성, 아름다워서 숭고한 것이 아니라 숭고하여 아름다운… 그 10일간의 제전.
6월도 끝나가는 초하의 나른한 어느 날, 파리 시절의 친구 프랑소와즈와 마드랜느(Francoise&Madeleine) 동성 커플한테서 한 통의 메일이 왔다.
“주 영, 안녕. 올여름 바캉스 계획은 뭐니? 우리 그룹 타들라샹스(Tadla- chance:‘당신에게 행운을’이란 뜻. 나(김주영)는 이 그룹의 멤버다)가 〈노마딕 빌리지(Nomadic Village)〉라는 프로젝트에 초대 되었어. 그런데 나는 마드랜느와 작업 계획이 이미 되어 있어서 바캉스 초에 런던으로 들어간다. 너 관심 있으면 혼자 참여할 것을 프로젝트로 만들어 요청해 봐.”
그녀는 커넥션 메일 주소를 보냈다. 메일 주소로 들어가 보았다. 오스트리아 빈에 거점을 둔 ‘언더로드프로덕션(On the Road Production)’이 기획하는 노마드 촌 프로젝트의 기획자 크라우스(Klaus Mㅤㄷㅝㄳring)와 교신했다. 마침내 그는 나의 참여 계획을 수락하고 초대장을 메일로 보냈다. 크라우스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으로 록 음악을 즐기는 사진작가다.
크라우스가 이동의 마을, 노마드 촌을 구상한 곳은 불가리아의 초원 지대인 동북 쪽 파브리케니(Pavlikeni)란 마을의 변두리다. 동쪽으로는 구릉과 초지가 광활하게 펼쳐지고 서쪽으로 마을을 낀, 그러니까 자연과 마을의 중간지대다. 여기서 중간지대란?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도시도 전원도 아닌, 마치 브스타망(도시의 버려진 변두리를 ‘풍경’으로 담는 프랑스 사진작가)의 렌즈가 머무는 곳, 그의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한적하고 삭막한 마을 변두리의 버려진 땅이다. 결코 낭만주의 풍의 전원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목가적 서정이 능선과 메마른 초지 위에서 마른 풀을 뜯는 소떼들 사이로 적막하게 흐르는 그 잔잔함이 결코 아름답지도 풍요롭지도 않다. 때로는 폐허가 있고 때로는 서민들의 텃밭, 집 잃은 강아지나 닭들이 뒤지기 좋아하는 쓰레기장이 있기도 한 곳이다. 이동의 마을, 또는 노마드 촌이 자리를 잡은 곳도 쓰레기장을 불도저로 밀어 임시 공터를 만든 곳이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면서 더운 열기와 함께 파고드는 쓰레기, 마른 말똥 냄새가 이를 예고하고 있었다.
15여 년 간 파리를 중심으로 서유럽에 살았지만 동유럽권에 들어가 본 경험이 없는 내겐 불가리아의 파브리케니라는 마을은 지리학적 공간 추적마저 어려웠다. 수도 소피아에서도 기차로 4시간 거리의 구릉과 초원 지대의 내륙인데 웬만한 지도에 명기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올 기약이 있기에 타자의 땅도 두렵지 않은 나다. 우선 베니스를 거쳐 육로로 파브리케니까지 가보자. ‘길 위에서 작업하다’란 컨셉트로 세계의 유랑인들이 그곳에 모여들 것이다. 그들과 동거 동락하면서 각자 작업하고 프레젠테이션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저마다의 삶의 길로 다시 떠날 것이다. 이것이 이번 노마드, 귀거래사적 구성의 ‘길 떠남’에 관한 구상이었다.

레인보우 히피(Rainbow Hippie)를 아시나요?
“주영, 여기 다수의 아티스트들이 레인보우 히피야.”

프 랑소와즈가 귀띔해준 말이었다. 히피, 1960년대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20세기의 대표적인 청년 문화의 하나를 형성했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21세기 히피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이는 문화적 노마드의 맥락을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1960년대 히피들이 표방하던 직접적인 반전(反戰)의 타깃이었던 베트남전이 끝났으나 세계는 여전히 전쟁의 도가니다. 레인보우 히피들은 언제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혐오한다.
그들의 특징은 1960년대 히피보다 많은 문화 양상의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우선 청년 문화라기보다는 방대한 문화 의식적 집단이었다. 일반적으로 동성연애자들로 보는데 물론 동성연애자들뿐만 아니라 트리플(3인이 동거) 성애, 독신 등 골고루다. 그러나 우리 노마드 촌에 프랑소와즈 동성 커플이 있었지만 그녀들은 히피가 아니었다. 1960년대 히피는 반사회적이고 약물중독자가 많다. 그러나 레인보우 히피는 사회생활에 적응을 잘하다가도 후딱 접고 히피 그룹에 참여한다. 가령 내 캠프 옆에 자리 잡은 미모의 엘레강스한 영국 여자는 비서직으로 돈을 벌어 은행에 넣고 카라반과 개 한 마리 그리고 현금인출카드 하나만 가지고 떠돈 지 1년이 되었다고 한다. 외모도 물론 가지각색이다. 삭발과 장발, 하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인도 치마만 걸친 사내들, 장식을 한가득한 화려한 의상을 아침저녁 바꾸어 입는 여인, 마음대로들이다.
그중 가장 뚜렷하게 다른 점은 1960년대 히피들은 아날로그적이었다면 레인보우 히피들은 컴퓨터와 핸드폰을 필수적으로 가지고 다니며 소통의 수단으로 삼는 디지털 노마드의 장본인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1960년대 히피는 비틀즈처럼 록 음악을 중심으로 광장형 집단이었다면 레인보우 히피들은 좀 더 다양하다. 노마드 촌에 모인 레인보우 히피들은 모두 예술가다. 예술은 요리에서 사진 영화 안마 퍼포먼스 설치에 이르기까지, 생태도 금욕주의자 광신자 자연주의자 생태환경전문가 시인 요리사 안마사…. 하나 더, 다른 점은 광장이 아닌 작은 이동식 마을을 형성하며 전전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의 가장 기본 원칙은 붙박이가 아닌 이동식 집이어야 한다. 노마드 촌을 기획한 언더로드프로덕션은 올해 불가리아에서 내년 영국으로 이동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

레 인보우 히피: 197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공개하고 시의원에 당선되었던 하비 밀크가 피살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한 대대적인 게이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무지개 빛 깃발을 들고 행진하면서 무지개 문양을 동성애의 상징으로 정착시킨 이 사건은 레인보우 히피의 발원이 되었다.
유럽 레인보우 히피들의 경우 양상이 다원적이며 집단 의식도 유연성이 있다. 디지털 노마드의 특성처럼 탈구조적이고 바이러스적 성향이 있으며 그래서 익명성을 보이기도 한다.

동유럽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택하다

8 월 16일 아침, 돌이(나의 삽살 강아지)를 이웃 동화작가 집에 맡기고 작업실을 나섰다. 베니스공항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바캉스 시즌인데다 비엔날레가 겹쳐서인지 시내로 가는 심야 공항버스는 여행객으로 빈틈이 없었고, 밤의 열기에도 땀내가 배었다. 난관은 이때부터였다.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기차역전은 숙소가 모두 동이나 버렸다. 계획한 설치작업을 위한 오브제들인 광목 10m, 수지로 뜬 손, 그 외 소품들, 디카와 캠코더, 거기다 노트북까지, 배낭과 가방은 벌써부터 나의 작은 체구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 봇짐을 끌고 겨우 골목길에 간판도 없는 인도인이 경영하는 숙소를 찾은 것은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였다. 이미 기진한 상태, 이번 여정의 힘겨움을 예감하며 새우잠에 빠졌다.
8월 17일 새벽이었다. 날이 새자 그냥 숙소를 나왔다. 베니스비엔날레의 메인 전시장 쟈르디니로 가는 배를 타기 전 역에 들어가 파브리케니행 기차 시간표를 확인하고 예약해야 했다. 동이 트는 베니스역 주변은 배낭족들의 노천 침실이나 다름이 없었다. 비싼 유로와 숙박비를 감안하면 내가 간판 없는 쪽방 숙소를 찾은 것도 사치스러울 정도인 것이 실감이 났다.
나는 베니스를 수번 왔었지만 처음으로 역 옆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화려하다는 성당에 들어가 조금 앉아 있었다. 그 웅대하고 화려한 그리스도교의 문화, 성전의 금장식 앞에서 난 솔직히 기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 인간의 파라노이아적 시뮬레이션 앞에서 무엇을 간구할 것인가. 눈을 감고 생각 없이 앉았다 슬그머니 나왔다.
역전은 금방 여행객들로 활기를 띠었다. 역시 동구와 서구는 커넥션이 쉽지 않아 베니스에서는 소피아까지만 기차 연결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우선 오스트리아의 빌라크(Villach)에서 표를 끊어 소피아까지 가고 거기서 파브리케니까지 다시 알아보아야 했다. 그래도 그 순서대로 순조롭게 가면 다행인 것이었다.
그날 저녁, 빌라크의 플랫폼에서 막 떠나려는 기차를 앞에 놓고 역무원은 마스터카드가 통하지 않는다고 현금을 요구했다. 표를 받아 쥐고 기차에 올랐다. 이때부터 나는 동구권 문화를 실감하게 되었다. 기차는 모두 2차대전 때의 것으로 보였다. 무쇠 창문은 거의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은 채 움직이지 않았고, 하오의 열기는 기차 내를 달구어 두통을 일으킬 정도였다. 에어컨은 상상도 할 수 없으며 화장실은 질금질금 나오는 물도 끊기고 쩔은 지린내가 바람을 타고 열차 내를 채웠다. 침대칸은 기차에서 직접 역무원에게 10유로를 현금으로 주어야 시트를 건네며 잠자리를 정해 받았다. 전혀 말도 알아들을 수 없고 글씨조차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기차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역의 이름이 무언지 모르는 것이었다.
문제는 역무원에게 기차표를 내밀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기차표에는 종착역이 벨그라드(유고슬라비아)로 되어 있었다. 결국 헝가리와 루마니아 국경을 지날 때마다 벌금을 물었는데 나중에 소피아에서 안 것은 빌라크역에서 지불한 요금은 소피아까지였고, 기차표에는 벨그라드까지로만 표시해 준 것이었다. 고의로 속인 것 같다. 한 프랑스 여행객이 충고해 주었다. “나도 그런 일이 있소. 그러니 표를 살 그때그때 확인하는 도리밖에 없소.”
30시간여를 기차에 있는 것은 지루하고 피곤했다. 8월 하순, 동구의 내륙 무더위는 우리네 그것보다 더한 듯했다. 이런 때는 옆자리 동행인에 따라 지루하냐 즐거우냐 정해지는 법이다. 마침 프랑스어를 하는 젊은 연인이 같이 있었다.

소피아에서 노마딕 빌리지로

기 차는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19일 저녁에 닿았다. 소피아에서 나는 쉴 겸 하루를 머물며 미술관과 도시를 돌아보기로 했다. 우선 유로보다 아주 싼 불가리아의 화폐 ‘레바’의 환율이 부담을 덜게 했다. 영어로 된 간판의 역 주변 게스트하우스에 방 한 칸을 정했다. 주인 아저씨와 소통은 제로, 눈치로 여권을 맡기고 선불하고 거리로 나왔다. 시내로 들어오니 러시아 정교 저편에 가톨릭교회가 있었고, 그 옆 이슬람 사원이 버젓이 있었다. 모두 들어가서 경건한 자세로 기도했다. 이슬람 사원은 온 몸을 망토로 두른 엄숙한 청년교도의 지시에 따라 그가 주는 망토를 걸치어 팔 다리를 가리고 들어가게 했다. 빈틈없는 세라믹의 청백색 모자이크가 아름다웠다. 거리의 사람들도 중동의 건장한 체격, 갈색 피부를 가진 남녀가 많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나는 이곳이 유럽이라는 것을 잊곤 했다. 슬라브 문화 속에서도 유구한 지리와 역사의 숨결 속에 흐르는 노마디즘을 읽을 수가 있었다.
중 심가에 다다르기 전에 재래시장을 만났다. 식품을 사며 구경했다. 만나는 시민들은 서민스럽고 소박하고 선량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인박힌 사람들이다. 허지만 서구인들을 선망하는 듯이 보였으며 반면 드문 외지인들을 몹시 경계하는 듯이 보였다.
나는 소피아의 박물관을 돌아보며 미묘한 예술의 정체성에 빠졌다. 가령 고고학박물관에 나란히 놓인 직립 원숭이의 해부학적 골격과 그 옆에 놓인 인간의 그것 사이에 너무나 유사한 구조를 보며 인간의 동물 되기를 실감한다든가, 자연사박물관에 들어갔을 때 식물관의 방대한 채집 표본 전시를 보며 베니스비엔날레의 〈콰드라 메디치날레(Quadra Medicinale: 벨기에관 제프 게이(Jeff Geys)의 전시)〉 보다 더 실감나는 생태적 테마인 예술 콘셉트의 보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감탄했던 점 등이다. 소피아에서 현대미술관을 보는 것은 흥미로운 것이 못됐다. 고전주의, 인상주의 또는 초기 추상미술의 서유럽 풍에 진저리난 나는 피곤하기도 하여 돌아오며 캔맥주 하나, 햄 한 조각 그리고 오이와 당근, 빵을 사들고 들어와 저녁을 먹었다.
다음날 아침 파브리케니행 기차를 탔다. 2등 칸에도 좌석 번호가 예약돼 있지만 승객들은 적당히 앉는 것을 허락할 만큼 심성이 여유로워 보였다.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삭막했지만 고산지대를 지나며 횡으로 이동하는 동유럽 지형의 수없이 지나는 긴 터널들이 어둡고 무거웠다. 노부부가 나에게 여기서 내리라고 미소 지었다. 이 자그마한 시골 역의 오래된 낡은 역사와 노쇠한 화물차들이 인상주의 풍경화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표를 파는 창구의 여자도 모자를 쓴 역무원도 전혀 한마디 영어를 하지 못했고, ‘노마딕 빌리지’를 알아듣는 이는 없었다. 그 때 꽤 인텔리 모드인 여인과 대학생 같은 청년이 들어오기에 영어로 물으니 소통이 되었는데 그 여인은 자기가 노마딕 빌리지에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다. 그곳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마을에 이미 방송으로 우리의 프로젝트가 보도되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일부 지식인 외 주민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언젠가 스페인의 작은 마을 까다케(달리의 생가 박물관이 있는 곳)에 갔을 때 세계적인 괴짜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살았었다는 사실을 아는 주민은 별로 없었던 일을 떠올리면 예술가와 시민의 감성적 소통에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친절한 그 여인의 자동차로 가려는데 어! 이상하다 싶어 짐을 확인했다.
 “큰일 났다. 광목 두루마리를 기차에 놓고 내렸어”
나 는 발을 굴렀다. “다 와서 잃어버렸어!” 나는 찾기를 포기하려 했다. 서유럽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끝장인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침착하게 역무원에게 이야기하고 역무원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통역에 의하면 역무원은 다음 기차가 닿는 정거장에 전화를 했으며 돌아오는 기차가 도착할 때 경찰이 그 짐을 가져다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정말로 다음 기차 편에 두루마리가 도착했다. 다행이 투명 비닐에 싸서 속에 이름 장소들을 명기했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동구 사람들의 정직성에 나는 감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례를 받을 생각지도 않은 듯 무뚝뚝하게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 낯선 여인은 낡은 디젤 자동차로 나를 노마딕 빌리지에 데려다 주었다.
마을을 통과하여 낮은 언덕을 지나 공장을 왼쪽으로 끼고 허름한 숲을 관통하니 시야가 트인 들판 앞에 팻말이 있었다. ‘노마딕 빌리지’. 나는 이미 와 있는 프랑소와즈를 차창 밖으로 불러대며 기뻐했다. 여인이 짐을 내려주고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져 버린다. 그러더니 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왔다. 나의 모든 여권, 재산(?)이 들어 있는 작은 가방을 차창으로 돌려주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져버렸다. 정직한 사람.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우리네 식으로 인사를 잘 하고 싶다.

29일 오후 3시, 퍼포먼스를 위해 작가의 텐트로 모인 예술가들은 광목 띠로 된 표시를 따라 들판을 가로질러 정원으로 이동했다.

21세기 디오니소스 제의(祭儀) 현장

노 마드 촌, 주변이 낮은 구릉으로 완만한 능선에 둘러싸인 조금은 을씨년스런 외곽지, 금방 지나온 마을의 지붕들이 언덕 위로 조금 보이는 마을의 변두리, 평평히 불도저로 밀어붙인 검은 흙더미는 거의 쓰레기여서 이미 냄새가 주변에 배어 있는 임시 공간이었다. 바람이 스치면 일어나는 흙먼지에도 쓰레기 냄새가 났다. 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코와 목이 벌써 알키한데 식사와 집회 기능을 갖는 백색 메인 텐트를 중심으로 이동식 집(이것이 우리들의 규약이다)이 이미 서너 채 있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는 간이 변소가 두 동 설치되어 있고 옆에 손 씻는 개수대도 마련되어 있었다.
반대편 그 너머에 집시들이 산다는데 그들은 가끔 마차를 몰고 언덕을 지나가거나 물을 길러 샘가에 오기도 했다. 집시 어린이들이 우리 마을에 구경하러 오기도 했는데 서유럽에서는 집시들이 도둑질을 하거나 어린 소녀 집시가 거지 또는 창녀가 되거나 하여 주의해야 한다고 인식되어 있었다. 언덕 너머에 그들이 산다기에 가보고 싶었지만, 역시 친구들은 위험하니 접근하지 말고 멀리서 망원렌즈로 사진을 찍으라고 조언해 주었다. 결국 동네 꼬마들을 모아 그림과 공작놀이를 하던 일본인 청년 캠프에서 집시 꼬마들은 모든 것을 집어 가버렸다.
그러나 내가 만난 집시 가족은 친절하고 선량해서 모든 걸 주고 싶다는 충동마저 느끼게 했다. 나는 집시 가족의 마차를 타고 좋아했다. 기실 집시야말로 서구의 노마드 민족이다. 하지만 몽골의 노마드들도 그러했듯 정착하여 땅 뺏기 전쟁을 하고 자본의 축척에 영악한 머리를 굴리는 자들에게 그들은 문명이란 잣대에 의해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 있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떠돌며 생존의 흔적을 길 위에 여기저기 남겨만 두었으니, 오늘날 우리는 부동산과 펀드에 눈이 어두워 그들의 아름다운 영혼의 노마디즘을 연민의 회상으로 바라볼 뿐…. 그들은 무력하게 전쟁과 자본에 밀려 저 지구의 귀퉁이에서 좀도둑질을 하고, 성을 팔아 연명하는 것이다. 세상은 모순의 카오스. 나는 우울했다. 그리고 나는 허망하나마 노마드의 로맨티즘에 빠지기로 했다. 괴로운 것이 싫었다.
프랑소와즈가 우선 이 프로젝트의 리더 크라우스를 소개해 주었다. 전형적인 북유럽 남자, 무릎이 모두 해진 모드의 바지와 티셔츠, 인민군 모자형의 낡은 창을 누르며 나를 맞는 가느다란 체형의 상냥한 남자였다. 그는 대형 버스를 자기 집으로 가지고 있었다. 지붕에 텐트를 쳐 잠자리를 하고 버스의 내부는 사진 암실, 주방 시설, 실내 잠자리와 책상, 기타와 악기 등, 책들이 산만하게 어질러 있었는데 숙소가 만만찮은 누군가가 잘 수도 있었다. 크라우스는 내게 메일로 원한다면 자기 버스 내에 머물러도 좋고 몽고식 겔도 있다고 했었다. 적당히 세운 임시 팻말 ‘노마딕 빌리지’ 입구에서 조금 내려다보이는 공터 가운데 백색의 중앙 텐트가 있는데 식당 겸 공동 집회장소다. 긴 테이블을 중심으로 대형 코카콜라 마크의 냉장고, 조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크라우스의 버스 뒤에는 엉성하게 천 조각으로 가려진 샤워와 설거지를 위한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처음에 이 장소는 동양인인 내게 아주 코믹한 풍경으로 비쳤다. 가령 어느 날 밥 먹은 접시를 씻으려고 막 이곳을 들어가려는데 이미 어떤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한 남자가 뒤돌아서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이 장면 앞에서 나는 차마 들어가지 못했는데 그들은 대낮에 샤워를 하고 누드로 수건을 든 채 나오기가 일수였다. 토마의 마누라는 무척 뚱뚱한 여자인데 등에 수건을 걸친 채 나오는 모습이 보테로의 여인처럼 재미있게 보였다. 그런데 이런 진풍경들이 전혀 음탕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못내 거기서 샤워를 못했던 나는 프랑소와즈의 진언으로 초대 손님을 위해 마련한 언덕 너머 호텔방 열쇠를 받았다. 그리고는 이런 수줍음이 오히려 사삭스러워 보인다고 내심 미안했다. 우리가 상상했던 누드촌이 얼마나 자연스런 자연의 모습일까. 나는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끝내 그 노천에서 샤워를 할 수 없었던 나는 자연스런 자연 앞에 위선자인가.
이태리인 마르티나(Martina), 그녀의 선정적 언행은 지중해의 다혈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새벽녘 나의 텐트까지도 그녀의 웃음소리는 간헐적으로 새어 들어오곤 했다. 그녀는 밤새 떠들고 놀고 새벽부터 잔다. 내가 도착한 다음 날 그녀는 아침 식탁 앞에서 선언했다. “내일 떠나기 때문에 오늘 오후 작품 발표를 하겠습니다.”라고. 그녀는 판화가인데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다. 미리 준비해 온 독성이 있는 화공약품에 노마딕 빌리지 주변에서 채취한 야생 열매를 으깨어 그 보랏빛 엑기스를 이 화공 약품과 섞어 물감을 만드는 행위였다. 그녀의 액션에는 산업 독성과 자연물이 물감을 만들어내는 생태계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날 우리 마을의 한 청년과 사랑에 빠져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마르타의 영화 촬영에 과감히 웃통을 벗고 엑스트라가 되어 주는 행위를 나중에 보여준다.
음 악가로 상당히 명성이 있다고 누군가 귀띔하여 준 토마(Thoma& Michaella) 부부, 북유럽 게르만계를 확연히 알 수 있는 몸집 큰 아내와 터키인의 혼혈인 듯한 남편. 미카엘라는 언제나 요란한 웃음을 거침없이 터트리는 유쾌한 여인이었다. 그들이 떠나기 전 날 밤 보여준 라이브 음악은 기타와 전자음악 반주를 곁들인 신나는 고별송이었다. 저녁 식사 후 언제나처럼 그날 밤은 미카엘라 남편과 크라우스의 음악 공연이 있었다. 크라우스의 버스 밑 짐 캐비닛을 열고 연주용 악기, 전자 앰프 등 기구들을 조립하고 조명까지 곁들이자 야외 음악공연 무대가 되었다. 이때 객석에 앉은 토마의 마누라는 좋은 해설자로 내조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공연 경력에 에피소드, 나중에는 연애와 결혼 얘기까지 그녀의 높고 활달한 음성은 밤하늘에 그녀 남편의 음악만큼이나 퍼져나갔다. 그들은 그 다음 날 우리 마을을 떠났다.
처음에 도착하여 벤(Bean)을 만났을 때 인상은 몹시 조용한 여자였다. 삭발을 하고 어깨와 목을 지나는 끈이 있는 비키니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퍼포머였다. 밤의 프레젠테이션에서 보여준 비디오에서 그녀는 구토 장면을 반복시키는 퍼포먼스 필름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인도와 네팔에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현장에서 작품은 〈닥터 벤〉이다. 자신의 캠핑카에 뒷문을 열고 환자를 맞는다. 환자는 예술가들이고 벤은 ‘예술가’라는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준다. 프랑소와즈가 베드에 누웠다. 벤은 의료카드에 인터뷰 내용을 기록한다. 처방은 책을 하나 읽으라고 내어준다. 그 책은 김수자의 화집이었다. 벤은 나중에 마르타의 영화에서 주연으로 등장한다.
라니아(Rania)는 비만한 체구를 가진 상냥한 아가씨였다. 남의 작업을 잘 돕고 거들고 편안히 대화하는 따듯한 성품이다. 사실 이곳에 모인 작가들 중에 미국인은 없었고 영국 여자 미리암 외 모두 다른 자국어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공통으로 영어를 쓰기 때문에 각기 다른 악센트와 서투름이 있었음에도 의사소통에 별 불편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정서적 분위기가 열려 있었던 것이다. 라니아는 언어학 전공이라 더욱 친절하게 대화의 다리를 놓는다. 그녀의 퍼포먼스도 몇 나라의 언어를 가지고 놀이를 하는 레슨 장면을 연출했다.

요리에서 사진 영화 안마 퍼포먼스 설치에 이르기까지

요 리를 맡은 월테르(Walter), 그는 외모로 보아 힌두교도인인 줄 알았는데 오스트리아인이라고 한다. 큰 키에 수염과 머리 스타일이 힌두교도 같다. 이곳 낮 동안의 열기는 모두의 옷을 벗겨 놓기에 적합하다. 월테르는 문신이 가득한 상체를 언제나 드러내 놓고 있었다. 인도인처럼 천 하나를 허리에 두른 그는 단단하고 반듯한 몸매를 은근히 과시하는 듯도 보였다. 첫날 프랑소와즈는 내게 “저 봐, 음식할 때 수염이 빠지는 것 아냐? 뭐 잘 생기긴 했지만….”하고 속닥인 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신중하고 특히 음식을 정성껏 만드는데 감동했다. 음식 만들기를 예술로 생각하는 그는 요리가 구도의 길이라고 믿는 것 같다.
아침, 동녘의 지평선으로 해가 올라오면 나는 일어나 물을 길러 가는데 이 때 모두는 잠에 빠져 있다. 그러나 월테르는 혼자 묵묵히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이 신중한 점은 그는 해 뜨는 동녘을 향해 요가를 한다. 모친으로부터 배웠다는 완벽한 폼의 절제 있는 요가는 그의 문신이 새겨진 웃통과 나발의 머리 스타일과 함께 인도 사원의 아침 풍경을 연상케 했다. 그의 요리법은 아시아 야채와 소스를 영양학적으로 요리에 적용하고 이 과정은 식사 전 모두에게 설명된다.
아침은 사과 자두 등 과일을 끓인 스프로 시작한다. 그리고 빵 한조각과 밥에 갖은 건과류를 넣어 지은 죽을 먹고 차나 커피를 마신다. 그들은 오전을 대개 그렇게 느릿느릿 보내는 것 같았다. 점심은 늦게 오후 3시 정도다. 샐러드와 빵 그리고 전채로 과일 멜론이나 수박을 먹는다. 연쇄적으로 저녁은 7~8시다. 쿠스쿠스나 스파게티, 소스가 많은 밥, 그리고 현지 산 치즈는 파브리케니 마을에서 직접 만든 두부 같은 색깔과 모양의 단백한 유제품이다. 고기류는 없다. 그들은 채식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맥주를 음료로 많이 마시는데 알코올 중독자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태양이 작열하는 하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미리암, 그녀와 개의 대화는 완벽해 보였다. “거렁뱅이 짓 하지 마라. 남에게 얻어먹지 말란 말야.”라고 말하며 병든 개에게 시간을 맞추어 약을 먹이는 정성을 보면 남달랐다.
사 람들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더위를 이기려 애쓴다. 텐트나 자동차의 그늘에서 일기를 쓰는 사람, 몽고식 겔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는 이, 어린이들과 놀이를 하거나 할 일 없이 잡담을 하는 이…. 얼핏 모두 산만하게 보인다. 프랑소와즈와 마드랜느는 샘가에서 할 설치 작품을 준비하고 페인트 통을 들고 나선다. 그녀들 커플은 작열하는 초지의 메마르고 거친, 마른 풀섶 위를 헤치며 태양열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정하게 샘가로 간다. 크리스티안은 아들과 그림을 그리고 있다. 월테르는 또 저녁 준비에 바쁘다.
마크 마르타(Marc&Marta) 커플은 처음부터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숨 막히는 태양 아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마른 나뭇가지를 모으고 더러운 쓰레기 봉지를 거두어 온다. 그들은 불을 사용하기 위해 관청에 들락거려야 했다. 건조기여서 어렵게, 그러나 결국 허가를 얻어냈다. 그리고 촬영 하루 전날 리허설이 있었다. 여기에 출연되는 사람들은 모두 자원한 노마드 촌의 작가들과 파브리케니 마을에서 자원 봉사 나온 초등학생과 주민들이었다.
다음날 촬영이 시작되었다. 마르타는 감독답게 “큐, 액션” “스톱”을 외쳐가며 장면을 연출했다. ‘미래 공동체, 아버지의 이름으로(Future Communities. The name of The Father, In Memoriam)’라는 긴 제목의 작품이었다. 심술스런 태양도 서산에 기울고 목동들도 말 소 양 염소 등 그들의 가축을 몰고 귀가 할 무렵, 어제 리허설에 참여했던 자원 엑스트라들은 삼삼오오 여기저기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옷을 벗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비키니 또는 상체는 전라에 슬립이나 살색 팬티스타킹을 입고 있어서 멀리서는 인체의 실루엣이 완전 누드로 착각될 수도 있는 형상이었다. 그들은 마르타의 지시에 따라 포즈를 취했다. 눈 뜨고 죽은 사체들이 산재해 있는 모습으로 마당에 나뒹굴어져 있는 인간 시체들의 모습이었다. 카메라 렌즈를 끌어당기면 눈을 뜬 채 부동의 얼굴 표정이 대단히 드라마틱한 효과를 냈다. 다시, 마르타의 신호가 떨어지자 삭발의 벤이 검은 원피스 차림으로 멀리서 나타나 아주 천천히 걸어 나온다. 그리고 누드의 다른 남자와 이 시체 위로 물을 뿌린다. 가운데 마른나무에 불이 붙기 시작한다. 둘은 앉아서 불꽃을 응시한다.
프랑소와즈 마드랜느 커플은 ‘샘/샘(Source/Resource)’을 테마로 샘가에 설치작업을 했다. 주변 쓰레기장을 모두 청소하는데 다 같이 하루가 걸렸다. 다음, 물이 나오는 샘 둑과 벽을 핑크빛으로 페인트칠했다. 내가 “야~ 핑크, 에로틱하다”고 하니까 그녀들은 주영도 웃길 줄 안다는 듯이 같이 웃었다. 그녀들은 키치를 표방하는 유치하고 가볍고 즐거운 놀이를 했다. 마을 장에 가서 조화를 사다가 유치찬란하게 샘가를 치장하고 꽃집에서 파는 정원 장식, 토끼도 한 쌍 사다 놓으며 키득거렸다. 그녀들은 박사학위의 지식인이었는데 늘상 단순 재미 유치한 장면 연출을 앞에 내놓고 슬며시 개념적 텍스트를 내미는 친구들이다. 이번 이들의 종결은 샘 앞의 너른 바닥에 색색의 초크로 각자 자기 모국어로 무엇이든 텍스트를 쓰는 것이었는데 이 기호적 문맥들은 판독할 수 없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었지만 의미가 있어 보였다.
크라우스는 이 프로젝트를 주관하며 자기 작업을 하는 가장 바쁜 사람으로 화장실에서도 전화를 받더라고 친구들은 그를 동정할 정도였으며 밥 먹을 시간도 없어 보였다. 수시로 마을 사무실에 가서 행정적 컨택을 해야했고 각 작가들은 저마다 요구사항이 달랐지만 그는 늘 친절한 매너를 잊지 않았다. 토마 음악가 커플이 떠날 때도 전 날, 낮에는 토마와 퍼포먼스를 했다. 그날 오후 갑작스런 회오리 바람이 노마드 촌을 휩쓸며 지나갔다. 검은 회오리 바람이 메인 캠프 식당을 완전히 망가트리고 뒤엎어 놓았다. 텐트가 주저앉았다. 냉장고가 넘어지면서 식품들이 나동그라졌다. 월테르는 이웃 캠프에 일본계 니아의 마사지를 받으러 가고 없었다. 니아는 전형적인 레인보우 히피 그룹으로 이 프로젝트 참여 후 다시 그 히피 집단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폭풍이 지나간 우리 마을은 아수라장이었지만 모두 힘을 합쳐 단숨에 원상태로 복구해 버렸다. 나는 내심 그들의 협동정신에 놀랐다.

김주영의 ‘쌀의 길’ 퍼포먼스. 먹물로 발자국을 남기며 광목 길을 따라 걷는다. 땅에 완전히 엎드려 몸을 대지에 대고 양팔을 벌렸다 머리 위로 모은다. 쌀 한 줌을 수지로 뜬 손에 옮긴다. ‘쌀의 길’이 완성된다.

여기 한 줌의 ‘쌀의 길’이 있다

토 마와 크라우스는 작은 리어카에 앰프와 기타를 실고 언덕으로 연주하며 리어카를 끌고 걸어갔다. 〈노마드 사운드 스튜디오, 디지털 스튜디오에서의 꿈(Nomadic Sound Studio Drama at the Distel_Studio)〉. 웃통을 벗은 크라우스는 지칠 줄 모르고 전자 앰프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간다. 둘은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한참만에 언덕의 능선 위로 그들이 나타난다.
음악에 도취된 그 둘의 풍경을 보며 나는 〈서편제〉를 생각했다. 파리 시절 나는 이 영화가 보고 싶었다. 난 솔직히 〈서편제〉를 공짜로 보기 위해 영화광인 프랑스 남자와 데이트를 했다. 그런데 영화관에서 촌극은 벌어졌다. 프랑스 남자는 젊잖게 스크린에 열중하는데 난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계속 울고 있는 것이었다. 너른 들판에 펼쳐지는 들풀의 물결을 헤쳐 걸으며 살기 위해 부르는 창의 메아리, 그 피맺힌 영가(靈歌)와 고수 소리가 나를 못 견디게 했나 보다. 거기 논밭이 어우러진 하늘에 닿는 들길, 그 길은 슬픔의 자락이었다. 그런데 파브리케니의 보리밭과 메마른 초지의 언덕은 전혀 다른 정서로 다가왔지만 ‘떠돈다’는 노마드적 맥락에서 사실 애잔한 우울증을 자극하기에 서편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날 밤 토마는 고별 라이브 음악 연주를 하고 자신의 인터뷰를 다큐영상으로 보여주면서 떠났다. 나중에 귀국하여 메일로 본 크라우스의 사진 작품은 흑백인데 마치 드로잉을 하듯 암실에서 수작업한 것을 보여주었다.
8월 29일과 30일, 프레젠테이션을 공개하며 초대 손님과 마지막 파티를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에필로그인데 크라우스는 친절하게 나에게 제의했다. 그는 프로그램 첫 번째로 나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비행기 예약 관계로 29일 노마드 촌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후 3시, 태양은 조금도 양보함이 없이 강렬한 30여 도의 햇살을 노마드 촌의 언덕 위에 내리꽂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의 캠프 앞에 동료들이 많이 모여 주었다. 미리 설치해 놓은 광목 띠로 표시된 길을 따라 우리는 나의 ‘비밀정원’까지 걸었다. ‘비밀정원’은 노마드 촌에 도착해서 10일간 아침저녁 물을 주며 가꾼 불타버린 불모의 땅이다. 이런 버려진 땅은 주변에 널려 있어서 나는 50×100cm의 대지를 광목 끈과 조약돌로 경계 짓고 가꾸니 풀잎이 솟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대지는 경이롭다. 나는 광목 길에 먹물로 발자국 흔적을 남기며 작은 제식을 벌였다. 〈쌀의 길(Le Chemin du Riz)〉. 나의 아틀리에 흙(안성 분토골)에서부터 길을 떠나 서유럽에서 동유럽 불가리아의 파브리케니까지의 긴 여로를 회상하며 거기 비밀의 정원에 도달했다. 땅에 완전히 몸을 엎드려 대지에 댄다. 아주 완벽하게 그리고 천천히 양팔을 십자로 벌리어 다시 머리 위로 모은다.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경건한 자세다. 자연의 신께 쌀 한 줌을 바치다. 비단길이 있었고 차마고도, 소금 길이 있었다. 여기 한 줌의 ‘쌀의 길’이 있다.
귀 국을 위해 소피아공항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눈 씻고 볼래도 없는 동양인 세계에서 다행히 택시 기사는 현대차가 좋다고 호의를 보이는 바람에 택시 값을 마구 부른다는 주의에도 두려움 없이 공항까지 왔다. 다음날 아침 7시 비행기를 공항 로비에서 적당히 기다려 보자는 심산이었다. 수도의 공항이라지만 벌써 사람들은 뜨막하고 공항 내는 어둠침침했다. 안전을 위해 고립되지도 않고, 또 주변 사람의 느낌이 좋은 곳을 찾아야 한다. 출국 체크를 하는 스탠드 앞에는 나 같은 생각을 하는 배낭족 또는 서민스런 아주머니가 벌써 벤치를 차지하고 눕거나 봇짐을 다시 챙기고 있었다. 모두 호텔비를 쓰지 않겠다는 심사렸다? 슬그머니 저만치 빈자리에 나도 자리를 잡고 기차역에서 미리 사온 맥주와 빵으로 요기를 했다. 그리고 일기를 쓰고 좀 눈을 부쳐 보리라 짐 보따리를 베고 누웠다. 눕는다기보다는 새우처럼 옹크리고 배낭에 기댔다.
잠깐 꿈속에서 나의 강아지 돌이를 만났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몇 차례 시계를 보다 5시에 일어나 버렸다. 스탠드바에 불이 켜지자 그토록 힘겨운 여정에도 고이 간직한 비장의 식품을 꺼냈다. 컵라면 하나! 바에 가서 커피를 한잔하며 갸르송(서비스 맨)에게 요청했다. “물 값을 낼 테니 이 컵에 뜨거운 물 반만 좀 주세요.” 그는 미소로 돈을 거절하며 커피 내리는 뜨거운 물을 라면 컵에 듬뿍 넣어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아침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떠난 자의 행복이 더해서인지도 모른다.

김주영 1948년 충북 진천 출생. 홍익대 서양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프랑스 파리8대학 조형예술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 <스님의 명상>이라는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세계 도처를 여행하며 제식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현재 홍익대 미술대학원 부교수.

art in culture는 김주영의 퍼포먼스를 특별 기획으로 게재한 바 있다. <DMZ프로젝트-떠도는 무명의 영혼들을 위한 제의>(2000년 11월호). <시베리아 프로젝트-쌀의 영혼제>(2001년 11월호), <현해탄 프로젝트-회상과 노마디즘: 어느 조센진 농사꾼 이야기> (2003년 8월호), <티벳 옌징 프로젝트-하늘에서 소금이 내리다>(2006년 12월호)

 
창 닫기